[프롤로그] 끝나지 않은 피의 연대기
수백 년 전, 광야. 이집트를 탈출해 약속의 땅으로 향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뒤통수를 비열하게 공격한 민족이 있었다. 아말렉 족속이었다. 분노하신 신은 이스라엘에게 엄숙한 명령을 내렸다.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지워버려라.'
시간이 흘러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베냐민 지파 기스의 후손' 사울이 왕좌에 올랐다. 그는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신의 명령을 받고 전쟁에 나섰으나,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전리품에 눈이 멀어 아말렉의 왕 '아각'을 살려둔 것이다. 결국 선지자 사무엘이 직접 나서 아각의 목을 쳤지만, 살려둔 불씨는 수백 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페르시아 제국에서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현재, 절대 권력을 자랑하는 페르시아의 심장 수산 궁.
제국의 1인자 아하수에로 왕의 뒤에서 세상을 호령하는 새로운 실세가 등장했다. 그의 이름은 하만. 바로 그 옛날, 목이 잘렸던 아말렉의 왕 '아각의 후손'이었다.
그리고 대궐 문턱에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왔던 유다인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이름은 모르드개. 아말렉을 완전히 진멸하지 못해 비극의 씨앗을 남겼던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베냐민 지파 기스의 후손'이었다.
모든 신하가 아각의 후손 하만 앞에 납작 엎드려 절할 때, 기스의 후손 모르드개는 단 한 번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이것은 단순한 자존심 싸움이 아니었다. 수백 년 전 광야에서부터 이어져 온, 결코 타협할 수 없는 두 혈통의 질긴 저주이자 숙명이었다.
칼자루는 다시 아각의 후손, 하만의 손에 쥐어졌다. 그는 자신의 조상이 당했던 수치를 갚기 위해, 눈엣가시 같은 모르드개뿐만 아니라 제국 전역에 흩어진 모든 유다인의 씨를 말려버리기로 결심한다.
제국의 화려한 장막 뒤에서, 수백 년을 뛰어넘은 가장 끔찍하고 거대한 복수극의 막이 오르고 있었다.
[1부] 제국의 새 안주인
인도에서 구스에 이르는 광활한 대륙. 세상의 모든 금은보화가 흘러들어온다는 페르시아 제국의 심장, 수산 궁.
아하수에로 왕은 제국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반년에 걸친 어마어마한 연회를 열었다. 대리석 기둥에는 하얗고 푸른 휘장이 은고리로 묶여 나부꼈고, 바닥에는 붉고 푸른 보석들이 카펫처럼 깔려 있었다. 황금 잔에 담긴 최고급 포도주가 물처럼 흐르던 마지막 7일째 날, 취기가 거나하게 오른 왕이 소리쳤다.
"내 곁에 있는 자들이여, 들으라! 오늘 밤은 제국의 영광을 완성하는 날이다. 당장 왕비 와스디를 내 앞으로 부르라! 그녀의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이 잔치의 끝을 장식하겠노라."
왕의 허세 섞인 명령에 내시들이 헐레벌떡 왕비의 처소로 향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파랗게 질린 얼굴로 돌아온 내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찬물을 끼얹은 듯 연회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폐, 폐하… 왕비마마께서… 오시기를 거절하셨사옵니다."
"…뭐라? 감히 내 명령을 거역해?!"
절대 권력자의 자존심이 수많은 신하들 앞에서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분노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왕은 당장 최측근 법률가들을 불렀다. 침묵을 깨고 교활한 신하 므무간이 나섰다.
"폐하, 이는 단순히 폐하를 능멸한 것이 아니옵니다. 소문이 퍼지면 제국의 모든 여인들이 지아비를 업신여기게 될 것입니다. 당장 폐위를 명하시고, 그 자리를 더 나은 여인에게 주시옵소서!"
그날 밤, 제국의 가장 아름다웠던 왕비 와스디는 차디찬 궁 밖으로 쫓겨났다.
새로운 룰렛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분노가 가라앉자, 아하수에로 왕은 불현듯 밀려오는 공허함과 외로움에 시달렸다.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제국 전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처녀들을 수산 궁으로 모아들이라는 어명이 떨어졌다.
수산 궁의 대궐 문을 지키던 하급 관리, 유다인 모르드개는 남몰래 한 소녀를 키우고 있었다. 일찍 부모를 여읜 사촌 동생, 하닷사. 페르시아식 이름으로는 '에스더'라 불리는 소녀였다.
그녀의 미모는 흙먼지 속에서도 숨겨지지 않는 보석과 같았다. 결국 왕의 관리들 눈에 띈 에스더도 궁으로 징출되고 만다. 궁으로 떠나기 전날 밤, 모르드개는 에스더의 손을 굳게 쥐며 당부했다.
"에스더, 내 말을 명심해라. 궁에 들어가거든 네 출신과 민족을 절대, 누구에게도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명심할게요, 오라버니. 걱정하지 마세요."
두려움 속에서도 에스더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궁녀들을 관리하는 내시 헤개는 수많은 소녀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에스더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는 에스더에게 특별한 화장품과 가장 좋은 자리를 내어주며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드디어 왕의 침소에 드는 날. 다른 처녀들이 온갖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할 때, 에스더는 헤개가 조언한 기본 장식 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 담백하고도 기품 있는 자태는 오히려 관능적인 궁중 여인들에게 지쳐있던 왕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왕의 눈빛이 요동쳤다.
"…이름이 무엇이냐?"
"에스더이옵니다, 폐하."
아하수에로 왕은 홀린 듯 에스더의 머리에 직접 왕후의 관을 씌웠다. 제국의 새로운 안주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 무렵, 대궐 문을 지키던 모르드개는 우연히 두 내시가 은밀히 나누는 대화를 엿듣게 된다.
"내일 밤, 왕의 목을 친다."
왕을 암살하려는 끔찍한 역모였다! 모르드개는 즉시 왕후가 된 에스더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에스더는 침착하게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역모를 고발했다.
조사 결과 모든 것이 사실로 밝혀져 두 내시는 나무에 매달렸다. 이 사건은 궁중 일기에 고스란히 기록되었으나, 어찌 된 일인지 모르드개에게는 아무런 포상도 내려지지 않은 채 조용히 잊혀져 갔다.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 사소한 누락이 훗날 제국 전체를 뒤흔들 거대한 나비효과가 될 줄은.
[1부 끝]
[2부] 드리워진 칼날
시간이 흘러, 아하수에로 왕의 총애는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에게로 향했다.
왕은 하만의 지위를 모든 대신들 위로 끌어올렸고, 대궐 문에 있는 모든 신하들에게 하만이 지나갈 때마다 꿇어 절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권력의 정점에 선 하만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사람들은 납작 엎드려 숨을 죽였다.
단 한 사람, 대궐 문을 지키던 모르드개만 빼고.
"저놈은 대체 누구기에 감히 내게 고개를 빳빳이 쳐드는가?"
불쾌감으로 일그러진 하만의 시선이 꼿꼿하게 서 있는 모르드개에게 꽂혔다. 주위 신하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그는 유다인이라 절하지 않는 것'이라 귀띔했지만, 하만의 뒤틀린 자존심은 이미 폭발 직전이었다.
'건방진 유다인 놈… 내 필히 저놈의 목을 치리라. 아니, 저놈 하나로는 내 분이 풀리지 않지. 제국에 흩어진 유다인 벌레들을 모조리 짓밟아버리겠다!'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의 서막이었다. 하만은 점쟁이들을 불러 유다인들을 몰살할 길일을 뽑았다. 제비(부르)뽑기로. 날짜는 12째 달인 아달월 13일로 정해졌다.
하만은 곧장 왕에게 달려가 교묘한 혀를 놀렸다.
"폐하, 이 광활한 제국 곳곳에 폐하의 법을 무시하고 자기들만의 기이한 풍습을 지키는 불온한 민족이 숨어 살고 있사옵니다. 저들을 살려두는 것은 제국에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사옵니다. 제게 저들을 진멸할 조서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제 사재를 털어 은 일만 달란트(*제국 1년 예산의 절반에 달하는 은 340톤)를 국고에 바치겠나이다!"
정무에 지쳐있던 왕은 귀찮은 듯 자신의 손가락에서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인장 반지를 빼어 하만에게 던져주었다.
"그 은은 네가 갖고, 그 백성도 네 소견에 좋을 대로 처결하라."
왕의 가벼운 승낙 한 번에 수만 명의 목숨이 날아가게 생겼다. 곧바로 제국 전역에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유다인을 하루 동안에 모두 도륙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라'는 끔찍한 조서가 나붙었다. 화려한 수산 성은 하루아침에 처절한 공포와 비명으로 뒤덮였다.
대궐 밖,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쓴 채 대성통곡하는 사내가 있었다. 모르드개였다.
그의 처절한 울음소리는 깊은 구중궁궐 안, 에스더의 처소까지 닿았다. 깜짝 놀란 에스더가 내시 하닥을 보내 자초지종을 묻자, 모르드개는 하만이 건넨 은의 액수와 도륙 조서의 사본을 쥐여주며 전갈을 보냈다.
[당장 왕에게 나아가 네 민족을 위해 간절히 구명하라!]
전갈을 받아 든 에스더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왕비라는 화려한 껍데기 속에 갇힌 그녀의 현실은 생각보다 위태로웠다.
"오라버니, 왕의 부름 없이 안뜰에 나아가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것은 제국의 삼척동자도 아는 법입니다. 폐하께서 저를 찾지 않으신 지 벌써 30일이나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어찌 함부로 나설 수 있단 말입니까?"
두려움에 떠는 에스더에게 모르드개의 서슬 퍼런 답신이 날아들었다.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착각하지 말라. 네가 만일 이때에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그리고, 에스더의 심장을 거세게 내리치는 한 마디가 이어졌다.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바로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정적. 무거운 침묵이 에스더의 처소를 맴돌았다. 겁에 질려 떨던 소녀의 눈빛이 이내 차갑고도 단단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녀는 결연한 목소리로 마지막 전갈을 내렸다.
"가서 수산에 있는 모든 유다인을 모으고, 나를 위하여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마시지도 말고 금식하소서. 나도 나의 시녀들과 함께 금식한 후에, 국법을 어기고서라도 왕에게 나아가겠습니다."
에스더는 화려한 비단옷을 움켜쥐며 읊조렸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3부] 피의 연회, 뒤집힌 운명
사흘의 금식이 끝난 날. 에스더는 가장 화려한 왕후의 예복을 갖춰 입고 어전 안뜰로 나아갔다. 부름 없이 왕의 공간에 발을 들이는 것은 곧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싸늘한 정적이 감도는 어전, 보좌에 앉아 있던 아하수에로 왕의 시선이 에스더에게 꽂혔다.
호위병들의 손이 칼자루로 향하던 찰나였다.
"……!"
왕의 눈에 비친 에스더는 몹시도 아름답고, 또 처연했다.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동한 왕은 쥐고 있던 황금 지휘봉을 에스더를 향해 쑥 내밀었다. 살려주겠다는, 아니 환영한다는 절대적인 신호였다. 에스더가 다가가 금규 끝에 손을 얹자 왕이 다정하게 물었다.
"나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오? 내 이 제국의 절반이라도 떼어 주겠소."
그러나 에스더는 성급하게 하만의 악행을 고발하지 않았다.
"폐하, 제가 오늘 폐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사오니, 좋게 여기시거든 하만과 함께 와주시옵소서."
왕과 함께 왕후의 단독 연회에 초대받은 단 한 사람. 하만의 어깨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결국 이 제국의 실세는 나다. 왕후마저 나를 이토록 대우하지 않는가!'
잔뜩 취해 궁을 나서던 하만의 기분은 대궐 문턱에서 확 구겨지고 말았다. 베옷을 벗고 다시 문지기 자리로 돌아온 모르드개가 여전히 고개 한 번 까딱하지 않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씩씩거리며 집으로 돌아온 하만에게 아내 세레스와 친구들이 섬뜩한 조언을 건넸다.
"대감, 뭣 하러 그 유다인 놈 때문에 기분을 망치십니까? 마당에 50규빗(약 22미터)짜리 거대한 장대를 세우십시오. 그리고 내일 아침, 왕께 아뢰어 그놈을 거기에 매달아 버리고 홀가분하게 연회에 가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하, 그거 참 기가 막힌 생각이군!"
그날 밤, 하만의 집 마당에선 모르드개를 매달 끔찍한 사형틀이 밤새도록 세워졌다.
그러나 같은 시각, 왕의 침전에서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유난히 잠이 오지 않던 아하수에로 왕은 밤을 새우며 궁중 일기를 읽어 올리게 했다. 지루한 기록이 이어지던 중, 왕의 귀를 번쩍 뜨이게 하는 대목이 지나갔다. 과거 두 내시의 암살 음모를 고발했던 '모르드개'의 이야기였다.
"잠깐. 나의 목숨을 구한 그 충신에게, 내가 무슨 관직이나 포상을 내렸더냐?"
"아무것도 내리지 아니하였사옵니다, 폐하."
왕이 미간을 찌푸리며 탄식할 때, 마침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모르드개를 장대에 매달 허락을 받기 위해 꼭두새벽부터 달려온 하만이었다. 왕이 하만을 다급히 불러들였다.
"하만, 이리 와보라. 내가 참으로 존귀하게 대우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그에게 어찌해주면 좋겠느냐?"
하만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왕께서 나 말고 누구를 더 존귀하게 하시랴!' 착각의 늪에 빠진 하만은 가장 화려한 상상력을 동원했다.
"폐하! 폐하께서 입으시는 왕복과 타시는 말, 그리고 왕관을 내어주십시오. 그리고 제국에서 가장 높은 대신의 손으로 그 옷을 입히고 말을 끌게 하여, 성중을 돌며 '왕이 존귀하게 하시는 자는 이리될 것이다!'라고 외치게 하옵소서!"
왕이 무릎을 탁 치며 환하게 웃었다.
"훌륭하다! 너는 당장 내 왕복과 말을 끌고 대궐 문에 있는 '유다인 모르드개'에게 가서, 네가 말한 대로 하나도 빠짐없이 행하라!"
"……예? 누, 누굴 말씀이시옵니까?"
하만의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자신이 죽이려던 원수에게 황제의 옷을 입히고, 자신이 직접 그 말고삐를 끌며 찬양해야 하다니. 하만은 굴욕감과 공포로 얼굴을 감싸 쥔 채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갔다. 아내 세레스조차 "그가 유다인이라면 당신은 꼼짝없이 망한 것"이라며 절망했다.
하지만 슬퍼할 틈도 없었다. 왕의 내시들이 들이닥쳐 하만을 에스더의 두 번째 연회장으로 끌고 갔다.
화려한 연회장. 와인 잔이 부딪치는 소리 너머로 아하수에로 왕이 다시 묻혀두었던 질문을 꺼냈다.
"왕후여, 자, 이제 그대의 진짜 소원이 무엇인지 말해보시오."
때가 왔다. 에스더가 자리에서 일어나 왕 앞에 엎드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지만, 그 안에는 벼려진 칼날이 숨겨져 있었다.
"폐하… 제 목숨을 살려주소서. 그리고 제 민족을 살려주소서!"
"무슨 소리요? 누가 감히 왕후의 목숨을 노린단 말이오?"
"나와 내 민족이 팔려서, 억울하게 죽임과 도륙함과 진멸함을 당하게 되었나이다. 우리가 노비로 팔렸다면 제가 입을 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원수는 폐하께 끼칠 손해를 보상할 수도 없는 끔찍한 자이옵니다!"
왕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감히 내 심장 같은 왕후를 해치려 마음먹은 자가 누구며, 그놈이 지금 어디 있느냐?!"
에스더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사시나무 떨듯 얼어붙어 있는 한 남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우리의 대적과 원수는… 바로 이 악한 하만이옵니다!"
번개를 맞은 듯 굳어버린 하만. 배신감과 극도의 분노로 이성을 잃은 왕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궁전 뒤뜰로 뛰쳐나갔다.
살길이 막막해진 하만은 이성을 잃고 에스더가 앉아 있는 긴 의자 위로 엎어지며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했다. "왕후마마, 제발 살려주십시오!"
그러나 뒤뜰에서 돌아온 왕의 눈에 비친 광경은 하만이 왕후를 덮치려는 시늉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네 이놈! 감히 내 앞에서 왕후를 겁탈하려 드느냐?!"
왕의 불호령이 떨어지자마자 무사들이 달려들어 하만의 얼굴을 천으로 덮어씌웠다. 그때, 곁에 있던 내시 하르보나가 조용히 고했다.
"폐하, 마침 하만이 폐하의 은인인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자기 집 마당에 50규빗짜리 장대를 세워두었사옵니다."
왕이 차갑게 명령했다.
"하만을, 그 장대에 매달아라."
모르드개를 찌르려던 칼날이 정확히 하만의 목을 관통했다. 그렇게 제국을 호령하던 권력자는 자신이 만든 장대 위에서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3부 끝]
[4부] 역전의 제국
하만의 시신이 장대에 매달리며 끔찍한 궁중 암투는 막을 내린 듯 보였다. 아하수에로 왕은 하만의 모든 재산을 에스더에게 넘겼고, 에스더는 비로소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 같은 존재, 모르드개의 정체를 왕에게 밝혔다.
왕은 하만에게서 빼앗은 절대 권력의 상징인 인장 반지를 빼어 주저 없이 모르드개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제국의 2인자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안심하기엔 이렀다.
"폐하, 하만은 죽었으나 그가 폐하의 이름으로 전국에 내린 조서, 제 민족을 진멸하라는 그 끔찍한 명령은 아직 유효하옵니다. 제발 그 조서를 철회해 주시옵소서!"
에스더가 다시 한번 왕의 발아래 엎드려 눈물로 애원했다. 아하수에로 왕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왕의 이름으로 조서를 내리고 인장 반지로 인친 것은, 제국의 그 누구도, 심지어 절대 군주인 나조차도 감히 취소할 수 없는 것이 페르시아의 법망이오."
절망이 에스더의 낯빛을 덮으려던 찰나, 왕이 모르드개를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허나, 새로운 조서를 내리는 것은 가능하지. 모르드개, 그대는 유다인들을 위해 가장 좋은 대로 내 이름으로 조서를 쓰고 내 반지로 인을 치라!"
그날 밤, 제국 역사상 가장 기민하고 통쾌한 칙령이 작성되었다. 모르드개의 명을 받은 역졸들이 제국의 가장 빠른 준마들을 타고 127도로 흩어졌다.
[아달월 13일, 유다인들은 각기 모여 목숨을 방어하라. 너희를 치려 하는 자들의 무리를 역으로 진멸하고, 도륙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라!]
조서가 수산 성에 나붙자, 베옷을 입고 통곡하던 유다인들의 거리에는 기쁨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푸른색과 흰색의 화려한 조복을 입고, 금관을 쓴 채 자색 베 겉옷을 두른 모르드개가 대궐 문을 나서자 온 성이 환호했다. 어제의 사형수가 오늘의 구원자가 된 것이다. 제국의 백성들은 두려움과 경외감에 사로잡혀 스스로 유다인이 되기를 청하는 자들마저 생겨났다.
운명의 아달월 13일. 본래라면 억울한 피비린내와 비명으로 가득 찼을 그날, 판은 완벽하게 뒤집혔다.
유다인들은 스스로를 방어할 뿐만 아니라, 평소 자신들을 핍박하고 혐오하던 원수들을 향해 거침없이 칼을 빼 들었다. 제국의 모든 관리와 총독들조차 새로운 실세인 모르드개를 두려워하여 유다인들을 도왔다.
수산 성에서만 5백 명이 처단되었고, 하만의 열 아들 역시 아버지와 같은 운명, 장대에 매달리는 최후를 맞이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그들의 널린 재산에는 단 한 손가락도 대지 않았다. 이것이 탐욕이 아닌, 생존과 정의를 위한 거룩한 심판임을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절망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된 아달월 14일과 15일. 유다인들은 칼을 내려놓고 거대한 승리의 잔치를 벌였다. 서로 맛있는 음식을 나누고, 가난한 자들에게 선물을 베풀며 구원의 날을 마음껏 축하했다.
이것이 바로 제비(부르)를 뽑아 멸망할 뻔했던 날이 완벽하게 역전된 기적의 절기, '부림절(Purim)'의 영광스러운 시작이었다.
그 후, 아하수에로 왕의 권력은 더욱 굳건해졌고, 제국의 2인자 모르드개는 유다인들에게 존경받는 위대한 영웅으로 남았다. 그는 자신의 동족을 위해 끊임없이 선을 도모했고,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이끌었다.
왕의 곁에서 제국을 지탱하는 거대한 기둥 모르드개, 그리고 그 모든 역전의 서막을 열었던 지혜롭고 용기 있는 여인, 제국의 영원한 안주인 에스더.
그들의 이야기는 페르시아의 가장 깊은 궁궐에서부터 제국의 끝자락까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빛나는 전설로 기록되었다.
[에스더 - 完]
[ 독자를 위한 안내 및 주의사항 ]
본 작품은 성경을 처음 접하거나 읽기 어려워하는 분들이 보다 쉽고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기획된 '드라마 웹성경'입니다.
작품의 뼈대와 핵심 진리는 성경 원문을 철저히 따르고 있으나, 서사의 몰입감과 입체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인물들의 대사, 감정선, 그리고 일부 배경 묘사에 웹소설 형태의 문학적 각색과 상상력이 더해졌습니다. 이는 성경 읽기의 진입장벽을 낮추기 위한 장치일 뿐, 신학적 교리나 역사적 사실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변개하려는 의도가 아님을 밝힙니다.
이 글이 성경이라는 위대하고 방대한 이야기로 들어가는 편안한 디딤돌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본 작품을 통해 이야기의 흥미와 감동을 느끼셨다면, 이제 실제 성경 원문을 펼쳐 그 안에 담긴 깊고 변함없는 진리의 텍스트를 직접 만나보시기를 적극 권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