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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조심스럽게


먼저 한 가지 고백부터 드리겠습니다.

이 글은 누군가를 정죄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더 깊이 그분께 닿고 싶은 그 간절함을 저는 진심으로 존중합니다. 다만, 그 사랑이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지 함께 생각해보고 싶어서 이 글을 씁니다.


쥐를 잡아오는 고양이 이야기

고양이를 키워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고양이는 종종 사냥한 쥐나 새를 주인의 발 앞에 가져다 놓습니다. 냉정하게 보면 달갑지 않은 선물이지만, 그 행동 뒤에 있는 마음만큼은 분명합니다. '내가 가진 가장 값진 것을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사랑의 표현입니다.

저는 방언을 뜨겁게 사모하는 분들이 꼭 이 고양이 같다고 생각합니다. 정죄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 마음이 진심이라는 걸 압니다. 하나님께도 분명 그 마음이 가닿을 것이라 믿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보시는 분이니까요.

그런데 한번 생각해 봅시다. 주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쥐입니까?

주인이 기뻐하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퇴근하고 돌아왔을 때 달려와 발목에 부비는 것, 무릎 위에 올라와 가르랑거리는 것, 그냥 곁에 있어주는 것. 관계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현관 가득 쥐만 쌓여 있다면, 주인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여쭤봐야 할지도 모릅니다.


'방언'이라는 단어 앞에서 우리가 멈춰야 할 이유

성경에서 '방언'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글로사(glossa)'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의미 없는 소리'나 '황홀경적 음성'을 뜻한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구조를 갖춘 실제 언어'를 의미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을 보십시오. 그 자리에 모인 각 나라 사람들이 무엇을 들었습니까?

"우리가 저들이 우리 각자의 언어(외국어)로 하나님의 큰 일들을 말하는 것을 듣고 있도다." (행 2:11)

놀라운 점은 '알 수 없는 소리'가 아니라, 각자가 태어나 자란 고향의 말로 복음이 선포되었다는 것입니다. 배운 적 없는 외국어로, 복음이 국경을 넘도록 하신 하나님의 전략적 은사였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방언의 최초이자 가장 선명한 정의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 안에서 보이는,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의 반복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고린도에서 온 유산: 이교도의 황홀경

1세기 고린도는 지중해 세계의 문화적 용광로였습니다. 이 도시의 초신자들은 개종 전, 그리스-로마 이교 문화에 깊이 젖어 있었습니다.

술과 광란의 신 디오니소스(Dionysus) 축제에서는, 신도들이 '엔투시아스모스(enthusiasmos)', 곧 신이 자신 안에 들어온 상태로 여겨지는 황홀경에 빠져 통제 불능의 비명과 의미 없는 소리를 내뱉었습니다. 이것이 당시 이교 세계에서 가장 '영적인 경지'로 추앙받던 현상이었습니다.

델포이 신전의 무당 '피티아(Pythia)'는 몽롱한 상태에서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렸고, 옆에선 사제들이 이를 해석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비극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개종한 성도들이 이 '황홀경의 소리'를 성령의 은사인 방언과 혼동하여 교회 안으로 들여온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천사의 언어'라고 불렀고, 자신들의 영적 우월성을 과시하는 도구로 삼았습니다.

학자 크리스토퍼 포브스(Christopher Forbes)는 그의 저서 Prophecy and Inspired Speech in Early Christianity(1995)에서 이것을 학술적으로 입증했습니다.

"고린도 교회 내의 소위 '방언(glossolalia)' 현상은 당시 헬라 이교 숭배, 특히 델포이의 피티아나 디오니소스 제전에서 나타나던 '광란의 음성'과 현상학적으로 동일하다. 바울은 이러한 이교적 습관이 교회 내로 유입되어 '성령의 은사'로 둔갑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은사의 기준을 공동체의 덕과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엄격히 제한한 것이다."

2천 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현상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면, 우리는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따르는 것이 성령의 은사입니까, 아니면 고린도에서 유입된 이교의 유산입니까?


바울은 왜 그 많은 장을 할애했는가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 전체를 방언 문제에 쏟아부은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만큼 심각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논지는 일관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알아들을 수 있는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방언으로 만 마디 말을 하는 것보다 낫다." (고전 14:19)

"만일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고전 14:23)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명확합니다. 은사의 목적은 나의 종교적 황홀감이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의 이해와 성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중요한 해석학적 사실이 있습니다. 성서학자 스탠리 스토워즈(Stanley K. Stowers)가 밝혔듯, 바울은 당시 철학자들이 즐겨 쓰던 수사학 기법인 '디아트리베(Diatribe)', 즉 상대방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한 뒤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기법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고대 헬라어 사본에는 인용부호가 없었기 때문에, 바울이 고린도인들의 잘못된 주장을 인용한 부분이 마치 바울 자신의 가르침처럼 읽히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절,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알아듣는 자가 없고"라는 구절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세계 최고의 고린도전서 주석가 앤서니 티슬턴(Anthony C. Thiselton)은 이 구절을 바울이 고린도 열광주의자들의 주장을 인용하여 비판하는 맥락으로 읽어야 한다고 분석합니다. 바울의 결론은 언제나 같습니다. 이성이 없는 영성은 열매가 없다.


'예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언'이라는 단어 역시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한국어 성경의 '예언(豫言)'은 한자로 '미리 예(豫)'를 써서 마치 미래를 예측하는 행위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성경 원문의 '프로페테이아(propheteia)'는 '앞에서 말하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선포하는 대언(代言)에 가깝습니다.

신학자 D.A. 카슨(D.A. Carson)은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신약의 예언은 새로운 계시를 받거나 점을 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회중의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하여 선포하는 대언의 사역이다. 예언의 참된 징표는 얼마나 신비한가가 아니라, 얼마나 공동체를 세우는가에 있다." Showing the Spirit (1987)

성경은 이 점을 이미 명확히 말하고 있습니다.

"예언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말하여, 그들을 세워 주고 격려하고 위로합니다." (고전 14:3)

"예수의 증언은 예언(대언)의 영이라." (계 19:10)

진정한 대언의 화살표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합니다. 신비한 미래를 맞추는 능력이 아니라, 공동체를 따뜻하게 세우는 말씀의 선포가 성경이 말하는 은사입니다.


다시, 고양이와 주인 이야기로

현관 가득 쥐를 쌓아두는 고양이를 탓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고양이가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고양이가 아닙니다. 우리는 말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주인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물어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알 수 없는 소리를 오래 내뱉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분의 말씀 앞에 조용히 앉아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까? 나의 황홀경에 취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옆에 앉은 지체를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세워주는 것입니까?

고든 피(Gordon Fee)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울이 방언보다 예언을 강조한 이유는 단 하나다. 예언은 이해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이해되지 않는 은사는 은사가 아니라 소음이다. 바울에게 영적인 것은 언제나 이성적인 질서와 함께 간다." God's Empowering Presence (1994)


마치며

이 글이 불편하게 느껴지신 분이 계실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당연합니다. 오랫동안 '이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믿어온 것에 대해 다른 시각을 제시받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탁드립니다. 이 글을 쓴 사람이 여러분을 미워하거나 정죄하려 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주십시오. 오히려 반대입니다. 여러분의 그 뜨거운 마음이, 하나님이 실제로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흐르기를 바라기 때문에 이 글을 씁니다.

바울의 마지막 당부를 함께 기억하며 마칩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고전 14:39-40)

은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은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 안에서, 그분이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그분을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쥐 대신, 그냥 와서 부비십시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부록: 오해하기 쉬운 바울의 구절들]


1. 고린도전서 14:2

기존 번역: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디아트리베 번역: "'방언은 사람한테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거고, 아무도 못 알아듣는 건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거니까 상관없다'고 치자. — 근데 그게 옆에 앉은 형제한테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거야?"

오용 방식: "못 알아들어도 돼, 하나님이 아시면 그만이야." 

바울의 실제 의도: 그들의 자기합리화 논리를 인용한 뒤, 14장 전체로 반박하는 도입부.


2. 고린도전서 14:4

기존 번역: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디아트리베 번역: "'방언은 자기 자신을 세우는 거고, 예언은 교회를 세우는 거다'라고 너희가 말하지? — 그래서 바울인 나는 지금 예언을 더 하라고 하는 거잖아."

오용 방식: "방언은 '나를 세우는' 개인 은사니까, 남이 뭐라든 내 신앙에 유익하면 그만이야." 

바울의 실제 의도: 이 구절은 방언의 가치를 인정하는 게 아니라, '자기만 세우는 것'의 한계를 지적하는 대조법입니다. 바울은 바로 다음 구절(5절)에서 "교회를 세우지 못하면 그게 무슨 의미냐"로 치고 나갑니다.


3. 고린도전서 14:14~15

기존 번역: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디아트리베 번역: "'방언으로 기도하면 내 영이 기도하는 거고, 마음은 몰라도 된다'고 치자. — 그럼 나는 이렇게 하겠다: 영으로도 기도하되, 반드시 마음으로도 기도할 것이다. 마음이 빠진 기도는 열매가 없으니까."

오용 방식: "방언은 영이 직접 하나님께 기도하는 거야. 머리로 이해 못 해도 영적으로 더 깊은 단계야." 

바울의 실제 의도: 티슬턴이 지적했듯,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영(pneuma)'은 성령의 직접 사역이 아니라 이성이 배제된 인간의 황홀경 상태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가정법("만일")으로 그 상태를 묘사한 뒤, "나는 절대 거기서 멈추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겁니다.


4. 고린도전서 14:18

기존 번역: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디아트리베 번역: "나 바울도 방언을 너희 누구보다 많이 한다, 하나님께 감사해. — 그런데도 교회에서는 방언 만 마디보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 다섯 마디를 택하겠다."

오용 방식: "바울 자신도 방언을 많이 했다고 인정했잖아. 방언이 틀린 게 아니란 거야." 

바울의 실제 의도: 이 구절은 방언 옹호가 아니라 양보의 수사법입니다. "내가 방언 경험이 없어서 이러는 게 아니다"라는 전제를 깔고, 바로 19절의 핵심 결론을 더 강하게 치기 위한 포석입니다. '감사하노라'와 '그러나(but)'의 대비가 이 구절의 핵심입니다.


5. 고린도전서 13:1 (간접 오용)

기존 번역: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디아트리베 번역: "'천사의 언어'라는 게 있다고 치자, 내가 그걸 한다고 치자. — 사랑이 없으면? 그냥 꽹과리 소리야."

오용 방식: "봐, 바울도 '천사의 말'이 있다고 했잖아. 우리가 하는 게 그거야." 

바울의 실제 의도: 이것은 디아트리베의 극단적 가정법입니다. "설령 그런 게 존재한다 해도"라는 수사적 양보이지, 천사의 언어가 실재하며 인간이 그것을 발화할 수 있다는 신학적 선언이 아닙니다. 바울의 화살표는 언제나 '사랑'과 '공동체'를 향합니다.


요약표

고린도전서 14:2

  • 흔한 오해: "못 알아들어도 하나님이 아시면 돼."

  • 바울의 진의: 고린도인의 자기합리화를 인용한 반박의 도입

고린도전서 14:4

  • 흔한 오해: "방언은 개인 은사니까 남 상관없어."

  • 바울의 진의: '자기만 세우는 것'의 이기적인 한계를 드러내는 대조

고린도전서 14:14~15

  • 흔한 오해: "마음 몰라도 영이 기도하면 더 깊은 거야."

  • 바울의 진의: 이성 없는 황홀경을 가정법으로 묘사한 후 부정함

고린도전서 14:18

  • 흔한 오해: "바울도 방언 많이 했다고 인정했잖아."

  • 바울의 진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아듣는 말이 낫다)'를 강조하기 위한 양보

고린도전서 13:1

  • 흔한 오해: "천사의 말이 실재하고, 우리가 하는 게 그거야."

  • 바울의 진의: 극단적 가정법으로, 사랑이 없으면 무의미함을 강조함


이 구절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울은 단 한 번도 "의미 없는 소리를 내는 것이 성령의 은사"라고 결론 내린 적이 없습니다. 오용되는 구절들은 모두 바울이 상대의 논리를 잠시 빌려타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고, 바울의 결론은 언제나 한 방향입니다.

"이해될 수 있는가? 교회를 세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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